2009년 11월 강원도 강릉에 때 이른 첫눈이 내렸을 무렵이었다. 언뜻 봐도
형편이 넉넉지 않아 보이는 중년 여성이 대한법률구조공단 강릉출장소로
들어왔다.
뇌질환으로 거동이 불편한 이연수(가명)씨는 휠체어에 몸을 의지하고 있었다.
얼굴에 여드름이 잔뜩 난 중학생 이주환(가명)군이 그 휠체어를 밀었다.
주환이는 연수씨를 '엄마'라고 불렀다. 하지만 연수씨는 주환이의 고모였다.
뭔가 답답한 사연이 있어 찾아왔을 텐데 연수씨는 상담직원 앞에서 쉽사리
말문을 열지 않았다. 뇌질환으로 말이 어눌한 탓도 있었겠지만, 삶의 고달픔에
짓눌린 듯한 그의 눈빛은 세상에 대한 불신과 경계로 가득해 보였다. '내 얘길
한다고 해결이 될까. 괜한 짓 하는 건 아닌가….'
그 옆에서 주환이는 천진난만한 얼굴로 사무실을 두리번거렸다. 자신에게
숙명처럼 드리워진 삶의 그늘을 아이는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침묵이 한참 흘렀다. 연수씨 입에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얘가 진 빚 때문에…."
"아니, 아이에게 빚이라니요?"
연수씨는 조카를 아들로 키워온 사연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푹 꺼진 눈은 바닥에
고정됐고, 목소리는 팍팍하게 메말라 있었다.
주환이는 세 살 때 부모가 이혼하면서 사실상 고아로 자랐다. 엄마는 곧
재혼했고, 아빠마저 얼마 지나지 않아 암으로 세상을 등졌다. 그때부터 고아가
된 아이를 연수씨가 돌봤다. 아이는 고모를 엄마로 알고 자랐다. 아이가 커서
고아라는 사실을 알까 봐 노심초사하며 키웠다고 했다.
'상속된 결핍'은 주환이에게 겹쳐서 다가왔다. 할아버지가 생전(生前)에 보증을
섰다가 진 빚 9000만원까지 떠안게 된 것이다. 채권자에게서 부실채권(빚보증)을
양도받은 한국자산관리공사가 주환이를 상대로 빚을 갚으라는 소송을 낸 것이다.
빠듯한 형편의 연수씨에겐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상담직원은 막막했다. 고아가 된 아이, 거기에 뜻밖의 빚 9000만원까지…. 어린
아이가 감당하기엔 너무 벅찬 이 결핍과 가난을 어떻게 채워줘야 할지 답이
나오지 않았다.
법률적으로도 걸림돌이 있었다. 주환이를 도우려면 상속받은 재산의 범위
내에서만 빚을 갚고 나머지 채무는 탕감받는 한정승인(限定承認)을 법원에
신청해야 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은 사정이 있었다.
한정승인 신청은 상속 채무가 상속 재산을 초과하는 사실을 안 날로부터 석 달
이내에 하도록 돼 있다. 그런데 주환이를 상대로 한 소송의 소장(訴狀)이 2009년
6월쯤 주환이 생모(生母)에게 전달된 것을 뒤늦게 알게 된 것이다. 소장이
전달되면 당사자가 관련 사실을 안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한정승인 신청
기한이 한참 지난 상황이 된 것이다.
▲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burbuck@chosun.com 소장이 주환이 생모에게 전달된
것은 생모가 주환이의 신분·재산상의 문제에 대한 권리를 가진
친권자(親權者)였기 때문이었다. 미성년자는 법적인 행위능력이 없다. 하지만
생모는 연락이 되지 않았다. 엄마와 아들이라는 멀고도 희미한 인연의 고리가
주환이에겐 사슬이 돼 버린 것이다.
연수씨는 더 막막하고 쓸쓸해 보였다. "그래도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요. 우리야
어찌 살겠지만, 아이가 불쌍해서…."
대한법률구조공단측은 한번 부딪혀보기로 했다. 사건을 맡은 강릉출장소의
나연찬 법무관은 "주환이를 묶고 있는 사슬을 풀어주지 않으면 아이의 미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먼저 생모의 친권을 상실시키고, 연수씨를 후견인으로 지정해 그가 미성년자인
조카를 대신해 한정승인을 신청하기로 했다. 주환이를 제대로 돌보지 않은
책임이 생모에게 있어서 친권 상실과 후견인 지정 신청을 인정받는 건 어렵지
않았다. 관건은 기한이 지난 한정승인 신청을 법원이 받아주느냐에 있었다.
나 법무관은 법정에서 주환이의 어려운 사정을 자세히 설명했다. 그러고는
생모가 소장을 받고도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정승인 신청
기간도 친권 상실과 후견인 지정이 있었던 때부터 진행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 대한 판례(判例)가 없어 승산은 높지 않았다.
마지막 재판이 있던 날, 상속된 채무액을 확인한 판사는 한동안 주환이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리고 딱 한마디를 던졌다. "이 아이에게 더 이상 이런
짐을 지워선 안 되겠네요."
법원은 한정승인 신청을 받아들였고, 주환이는 빚을 탕감받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연수씨는 주환이를 정식으로 양자(養子)로 기르고 싶다는 뜻을 공단측에
전했다. 입양허가 신청을 거쳐 주환이는 법적으로 고모의 '완전한 아들'이 됐다.
주환이는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옆에서 끝까지 지켜준 고모가 있었고, 법도
외면하지 않았다. 툭하면 이혼하는 세상이 된 요즘, 우리 옆집엔 버팀목조차
없는 아이들이 대물림한 빈곤에 비틀거리고 있을지 모른다. 그 아이들이 어떻게
세상을 바라보며 자랄 것인가. 한 아이의 부모라는 무거운 운명을 헌신짝처럼
내팽개치는 사람들이 있는 건 아닌가. 그런 질문을 주환이가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